박범신 작가의 『은교』는 노시인과 젊은 소녀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욕망, 예술, 시간, 순수, 노년의 자의식 등을 심도 깊게 다룬 작품이다. 세대 간의 간극을 넘어서는 욕망의 진실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고독을 날카롭고도 서정적인 언어로 담아내며, 도발적인 주제 속에서도 깊은 철학적 성찰을 유도한다.
『은교』, 욕망의 윤리와 순수의 경계에서 인간을 묻다
문학은 종종 금기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색한다. 박범신 작가의 장편소설 『은교』는 그러한 문학적 시도 중에서도 가장 용기 있고 치열한 결과물 중 하나다. 이 작품은 여든이 다 된 노시인 이적요와 열일곱 살 고등학생 은교, 그리고 이적요의 제자이자 문단 후배인 서지우 세 사람 사이의 미묘하고도 긴장된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품은 단순한 금기적 로맨스를 넘어, 나이와 존재, 욕망과 예술, 노화와 생명력, 윤리와 충동에 대한 통렬한 질문을 던진다. 노시인 이적요는 이미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인물이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명성을 얻었고, 말년에는 명예와 안정을 누리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자신의 육체적 쇠퇴와 예술적 무기력에 괴로워하고, 생의 열기와 거리를 느낀다. 그러던 중 등장한 소녀 은교는 그에게 새로운 생명력과 함께 혼란을 불러온다. 이 작품에서 은교는 단순한 대상화된 소녀가 아니라, 노년의 자의식과 욕망을 비추는 강력한 거울이며, 동시에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다. 이적요는 은교를 통해 잊고 있던 ‘감각’과 ‘충동’, ‘존재의 실감’을 되찾는다. 그녀의 웃음, 호흡, 움직임 하나하나는 노시인에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단지 노인의 추억이나 연민이 아니라, 분명한 육체적 욕망을 수반한다. 작가는 이 적요의 욕망을 비난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인간적 감정으로 제시한다. 이것이야말로 『은교』가 가진 문학적 용기이며, 작품의 긴장감을 이끌어내는 핵심이다. 또한 이 소설은 단순히 욕망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품은 욕망과 예술의 관계, 순수함이란 무엇인가, 나이는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특히 이적요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은교는 단지 젊은 여성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예술적 영감이자 존재의 빛으로 제시된다. 그에 반해 서지우는 젊고 유능하지만 어딘가 이중적이며 냉소적이다. 그는 은교에 대한 욕망을 숨기면서도 끝내 그녀를 차지하려 하고, 이적요의 유산과 명성까지도 탐한다. 이 둘의 갈등은 단지 세대 간의 갈등이 아니라, 진정성 대 위선, 영혼 대 야망의 대립으로 확장된다. 『은교』는 이러한 인물들의 내면과 관계를 섬세한 언어로 파고든다. 박범신의 문장은 절제되면서도 치명적이다. 독자는 노시인의 독백을 통해 욕망의 속살을 목도하고,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억눌러왔던 감정은 과연 죄인가, 욕망은 인간다움의 증거인가, 나이든 자의 사랑은 추한가, 혹은 더욱 숭고한가. 이처럼 『은교』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복합적인 질문을 문학적 서사로 풀어낸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노인과 소녀의 사랑’이라는 외형 너머로, 인간 존재가 가진 고독과 갈망, 예술과 진실성의 문제에 도달한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이야기나 가벼운 자극이 아니며, 읽는 이로 하여금 ‘삶의 온도’를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깊이 있는 문학이다.
욕망, 예술, 배신 — 세 인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민낯
『은교』의 중심은 세 인물의 관계에 있다. 이적요, 은교, 서지우. 이 셋은 나이, 입장, 목적이 전혀 다르며,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갈등과 감정의 교차는 소설 전체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이적요는 노시인이며,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다. 그는 명예를 갖췄지만, 젊은 날의 열정을 잃고 허무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점점 쇠퇴하는 육체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그에게 은교는 단순한 아름다운 소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적요에게 젊음, 생명, 감각, 그리고 시의 언어 자체다. 은교는 복잡한 인물이다. 단지 순진한 여고생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매력을 인식하고 있으며, 성숙하지 않은 감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누군가에겐 좌절을 안기며, 자신도 모르게 세 사람 사이에 갈등의 중심이 된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그녀는 결코 대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은교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주체적 존재로, 그녀의 시선과 반응 하나하나가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인물, 서지우는 이 소설의 가장 복잡하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는 이적요의 제자이자 후계자처럼 행동하지만, 내심으로는 스승의 위치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 은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에게 이성적인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합리화하려 하며, 결국에는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한다. 이는 은교의 자유로운 존재성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작품 내 갈등을 심화시킨다. 이들의 삼각 구도는 단순한 연애 갈등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완전함과 욕망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이적요는 자신의 감정이 부끄럽지만 숨기지 않으며, 서지우는 감추려 하지만 오히려 더욱 위선적이다. 은교는 이들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동시에 어떤 구속도 거부한다. 그녀는 ‘사랑’이 아닌 ‘자유’와 ‘진실’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이와 함께 박범신은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이들의 욕망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적요는 시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고, 그것이 예술적 성취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서지우는 예술보다는 명성과 사회적 인정에 더 가치를 둔다. 이는 두 사람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요소로 작용하며, 독자는 어느 쪽이 진정한 예술가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이적요는 서지우의 배신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남긴 일기와 원고, 그리고 은교에 대한 감정까지도 모두 지우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순간, 그는 ‘글’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기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품는다. 이는 곧 문학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단순한 연애소설을 넘어선 예술철학적 깊이를 형성한다. 『은교』는 이렇듯 인간의 본성, 예술의 윤리, 욕망의 변증법을 집약해낸 작품이다. 한 노인의 사랑이라는 외형 속에 담긴 인간적 고뇌와 윤리적 질문들은 소설이 끝난 후에도 독자에게 오래도록 남는다.
『은교』가 던지는 질문, 그리고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성찰
『은교』는 수많은 논쟁을 낳은 작품이다. 특히 그 소재가 ‘노인과 미성년자의 관계’라는 점에서 일부 독자에게는 불편함을, 다른 독자에게는 문학적 도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박범신 작가는 이러한 소재를 단순한 자극이나 금기로 소비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해 인간 존재의 내밀한 진실을 꿰뚫는다. 이 작품은 단지 나이 차가 큰 두 인물 간의 감정이라는 외피를 입고 있을 뿐, 본질적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담고 있다. 이적요의 욕망은 단지 육체적 충동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갈망이며, 삶을 마주하는 마지막 시인의 자세다. 그는 은교를 욕망하지만, 동시에 그녀에게 감탄하고, 그녀를 통해 자신이 잃어버린 감정과 언어를 되찾는다. 이적요의 사랑은 어쩌면 인생의 마지막 고백이며, 자신이 쓴 모든 시보다도 진실한 감정의 발현일 수 있다. 서지우는 현대인이 자주 보여주는 모순과 위선을 상징한다. 겉으로는 도덕적이며 이성적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욕망을 은폐하며 그것을 정당화하려 든다. 그에게 있어 은교는 대상이며, 그의 욕망은 이적요보다 훨씬 더 위선적이고 계산적이다. 이러한 인물은 우리 사회에 대한 작가의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하다. 은교는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한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욕망, 생명력, 순수함, 위반, 자유. 이 모든 키워드를 품고 있으며, 소설 속 인물들은 그녀를 통해 무언가를 투사하고 깨닫는다. 은교는 대상이 아닌 거울이며, 해체자이고,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은교』는 단지 도발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자 철학이다. 인간은 욕망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도덕은 언제부터 억압이 되는가? 예술은 진실을 말해야 하는가? 박범신은 이 작품을 통해 그러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불편하지만 진실한 사유의 장으로 이끈다. 『은교』는 그래서 불편하면서도 아름답다. 그것은 우리가 눈을 돌리고 싶었던 진실에 정면으로 응답하며, 문학이 여전히 ‘사유의 공간’임을 증명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장까지 다다랐을 때, 독자는 깨닫게 된다. 사랑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며, 욕망은 죄가 아니며, 인간은 그 자체로 언제나 복잡하고 존엄하다는 것을.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세대를 위한 소설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한 번쯤은 마주할 수밖에 없는 본질의 문제에 대해 담담하고도 정직하게 써 내려간 박범신 문학의 정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