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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허균, 최후의 19일』 혁명가의 최후를 향한 지성의 고뇌

by KKOKS79 2025. 4. 25.

 

김탁환의 소설 『허균, 최후의 19일』은 조선 시대의 천재 문인 허균이 사형당하기 전 마지막 19일의 심리와 사상을 담아낸 역사소설이다. 단순한 영웅전이 아닌, 시대와 싸우다 끝내 패배한 한 사상가의 고독과 이상, 그리고 혁명의 꿈이 남긴 흔적을 섬세하고 묵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허균의 사상과 최후의 날들을 따라가며, 시대의 부조리 속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지성과 용기에 대해 성찰한다.

 

허균의 마지막 날들

 

소설 줄거리 요약: 죽음을 기다리는 지성의 기록

『허균, 최후의 19일』은 조선 광해군 시대를 배경으로, 실존 인물 허균이 역모죄로 체포되어 사형당하기까지의 마지막 19일을 시간 단위로 따라가는 서사 구조를 가지고 있다. 허균은 ‘홍길동전’의 작가이자 실학적 사상을 실천하려 했던 지식인으로, 당시 지배 질서에 도전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소설은 허균이 형조 감옥에 갇힌 채 지난 생을 반추하는 독백과, 그를 심문하는 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그는 고문과 굴욕 속에서도 자신이 추구한 이상—양반 중심 사회의 개혁, 민의(民意)의 정치, 모든 이가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을 꺾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허균은 오히려 더욱 명료하게 시대의 모순을 꿰뚫으며, 역사의 기록과 개인의 신념 사이에서 자신이 지닌 모든 언어로 마지막 저항을 이어간다.

 

허균이라는 인물: 문인에서 사상가로

허균은 흔히 『홍길동전』의 저자로 기억되지만, 그는 단순한 문인이 아닌, 조선의 체제에 의문을 품고 실천으로 옮긴 혁명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형 허성은 보수적인 관료였던 반면, 허균은 자유로운 사고와 이단적 사상을 지닌 인물로, 동시대인들에게 ‘위험한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사대부 중심 사회에서 출신과 신분에 관계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고, 그러한 생각을 문학과 정치에 투영했다. 특히 『홍길동전』은 양반 제도를 부정하며, 이상적인 공동체를 설계한 최초의 한글 소설로 평가받는다. 김탁환은 이 소설에서 허균의 마지막 19일을 통해, 그가 단지 글을 쓴 작가가 아닌, 삶 자체로 사상을 증명하려 했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음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혁명과 배신, 그리고 고독의 정치

『허균, 최후의 19일』은 단순한 개인의 전기적 서사를 넘어서, 권력과 이념의 충돌, 그리고 혁명의 허상과 진실을 파헤치는 정치 소설이다. 허균은 조정 내 개혁 세력과 손잡지만, 곧 그들에게서도 배신당하고 외면당한다. 혁명의 길이 순탄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소설은 특히 허균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그의 사상을 왜곡하려는 심문관들과의 대화에서 그가 얼마나 고독한 존재였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신념을 철회하지 않고, 역사와 미래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남긴다. 이 과정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시대가 억누를 수 없는 사상의 생명력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김탁환의 문체와 역사 해석의 깊이

김탁환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균의 내면과 시대적 배경을 촘촘히 엮으며, 문학적 상상력을 가미한 밀도 높은 서사를 구성한다. 그의 문체는 철학적이며 시적이고, 동시에 기록자적 엄정함을 지니고 있다. 독자는 마치 허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정밀한 독백과,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감옥 안의 생생한 장면 묘사를 교차하며 읽게 된다. 그는 사실에 갇히지 않고, 역사 속 ‘틈’을 통해 인간의 진실을 파고든다. 특히 권력에 맞서는 지식인의 자세, 그 지식이 어떻게 시대와 충돌하고 고독해지는가를 긴장감 있게 보여준다. 김탁환의 역사 해석은 허균을 성인이나 영웅으로 그리기보다, 고뇌하고 흔들리는 인간으로 그리는 데 그 미덕이 있다. 이로써 독자는 허균을 다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만난다.

 

『허균, 최후의 19일』이 오늘날에 주는 울림

오늘날에도 『허균, 최후의 19일』은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진실을 말하는 자는 왜 고립되는가?”, “지식인은 시대에 맞서야 하는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허균은 실패했지만, 그의 실패는 미래를 위한 뿌리였다. 김탁환은 이 소설을 통해, 역사에 묻힌 사상의 힘과, 그것을 감당하는 인간의 고통을 되살려낸다. 이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지식과 용기, 양심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깊은 위로이자 도전이다. 『허균, 최후의 19일』은 말한다. “어떤 죽음은 잊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 싸움을 계속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위한 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