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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흑산』 줄거리와 유배지에서 기록한 구원의 언어

by KKOKS79 2025. 4. 26.

 

김훈의 소설 『흑산』은 조선 후기 종교적 탄압과 정치적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유배지 흑산도로 향하는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신념과 고통, 인간 구원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 역사소설이다. 이 글에서는 『흑산』의 줄거리와 주요 인물, 문체의 미학,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언어로 구원을 모색하는 김훈 특유의 문학적 태도를 조명한다.

 

흑산의 석양 풍경

 

줄거리 요약: 흑산으로 유배된 영혼들의 항해

소설은 정약전이 천주교 박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되며 시작된다. 그는 형 정약용과 함께 조선의 지성으로서 개혁을 모색했지만, 시대는 그들을 종교적 반역자이자 정치적 위험 요소로 몰아세웠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멈추지 않고, 바다 생물에 관한 기록과 자연 관찰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성찰한다. 이와 함께 소설은 정약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천주교 신자, 관리, 포교, 어부, 그리고 조정의 감시자들—의 시선을 교차시킨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본 흑산도와 유배의 삶은 단지 물리적 고립이 아닌, 내면의 흐름과 통찰의 장이 된다. 주인공들은 말과 글을 통해 자신을 지키며, 역사의 광풍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간직하려 한다. 결국 『흑산』은 유배라는 형벌의 시간을 언어로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기록이자, 죽음과 억압 앞에서 ‘기록하는 존재’로서 살아가려는 자들의 이야기다.

 

정약전이라는 인물: 고요한 저항의 상징

정약전은 실존 인물이자, 김훈의 소설 속에서 가장 절제된 방식으로 저항하는 지식인의 상징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과 삶을 외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연과 인간을 기록한다. 『흑산』에서 그의 언어는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지성의 빛이다. 정약전은 물고기의 이름을 외우고, 그들의 생태를 탐구하면서, 자신이 잃은 세상과 단절되지 않으려 한다. 그는 세상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고요하게 저항한다. 그의 글은 시대의 기록이자, 억압을 견디는 내면의 고백이다. 김훈은 이러한 정약전을 통해 말한다. 목소리를 낼 수 없을 때, 언어는 오히려 더 깊은 저항이 될 수 있다고. 정약전은 죽음과 가까운 삶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말’을 택한 자이다.

 

김훈의 문체와 ‘말의 무게’

『흑산』은 김훈의 문체적 특징이 가장 농밀하게 드러난 작품 중 하나다. 짧고 절제된 문장, 군더더기 없는 묘사, 그리고 문장 자체에 무게가 실린 말투는 유배지의 정적과 내면의 격동을 동시에 전달한다. 김훈은 인물의 고통을 외적으로 묘사하지 않으면서도, 언어의 결을 통해 감정의 진폭을 전달한다. 그의 문장은 마치 조각과도 같아서, 하나하나가 삶과 죽음, 고통과 침묵의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특히 바다와 섬, 생물의 묘사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정신 상태와 상황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물고기를 보는 눈은 곧 인간을 보는 눈이며, 기록하는 손은 곧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다. 김훈의 『흑산』은 언어로 쓰는 역사이며, 말이 고통을 이기게 하는 방식의 문학이다.

 

역사와 인간: 종교 박해를 넘는 보편성

소설은 신유박해라는 조선 후기의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단지 특정한 사건이나 시대에 갇히지 않는다. 천주교 탄압은 단지 하나의 맥락일 뿐, 그 안에서 김훈이 진짜 말하고자 한 것은 억압과 자유, 기록과 망각, 존재와 소멸의 보편적 인간 문제다. 박해의 중심에 있는 신자들은 단순한 종교인이 아니라, ‘믿는 것’을 통해 삶을 구성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시도다. 그리고 그 시도는 시대에 따라 탄압되기도,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김훈은 이러한 흐름을 통해 인간의 자유가 어떤 구조적 힘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지를 절묘하게 드러낸다. 『흑산』은 역사의 한 부분을 넘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소수의 탄압’과 ‘기록자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

 

『흑산』이 던지는 현재적 메시지

김훈의 『흑산』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역사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기록해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이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도 언어를 놓지 않았고, 그는 기록함으로써 살아남았다. 오늘날의 우리는 정보의 과잉 속에 살고 있지만, 진짜 ‘말’은 오히려 사라지고 있다. 김훈은 『흑산』을 통해 언어의 본질과 책임, 그리고 말의 무게를 다시 상기시킨다. 고요하지만 강하게, 『흑산』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떤 방식으로 너 자신을 기록하고 있는가?” 『흑산』은 죽음과 침묵,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록했던 사람들의 서사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묵직한 언어의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