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한국어 말살 속 정체성에 대한 문학적 성찰

by KKOKS79 2025. 4. 26.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는 한국이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일본의 일개 지방으로 편입된 가상의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대체 역사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국어가 사라지고 일본어가 공용어가 된 사회에서, 언어와 정체성, 민족성과 기억의 의미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한 개인의 언어 탐색 여정을 통해 식민주의의 본질과 그 폐해를 고발한다.

 

복거일 『비명을 찾아서』

 

소설 줄거리 요약: 잊힌 언어를 찾아 떠나는 여정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은 젊은 일본인 기자 '가토'다. 그는 조선(한국) 지역을 탐방하던 중, 우연히 한국어의 흔적을 지닌 이질적인 공간과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공식적으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한국어가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그에게 하나의 미스터리로 다가온다. 호기심은 곧 집착으로 발전하고, 그는 비밀리에 한국어 사용자가 존재한다는 단서를 좇기 시작한다. 소설은 그의 여정을 통해, 일제 식민 지배가 성공적으로 지속된 대안 역사 속에서 한국이라는 민족 정체성과 문화가 어떻게 말살되었는지를 드러낸다. 가토는 점점 자신이 속한 제국주의 질서에 의문을 품게 되고, 언어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닌, 기억과 존재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그는 '한국어'를 말하는 노인을 통해 잊힌 언어의 마지막 목소리를 듣게 된다.

 

‘한국어의 죽음’과 민족 정체성의 말살

복거일은 이 소설을 통해 언어와 민족의 운명을 직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이 단순한 지배를 넘어서, 언어 말살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우려 했다는 점을 극대화하여 묘사한다. 『비명을 찾아서』는 언어가 사라지면 민족도 사라진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며, 언어 말살은 곧 집단 기억의 삭제, 정체성의 부정으로 이어진다. 작품 속 세계에서 한국어는 철저히 금지되었고, 오직 은밀하게 전승되는 소수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가토는 점차 그 언어가 단순한 발음과 문법의 집합이 아닌, 하나의 문명적 자산임을 깨닫고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복거일은 언어를 정치적 통제 수단이자 저항의 도구로 바라보며, ‘말을 잃는다는 것’의 공포를 강렬하게 전한다.

 

대체 역사소설이라는 형식의 힘

『비명을 찾아서』는 전통적인 역사소설이 아니라, ‘대체 역사소설(Alternative History)’이라는 독특한 형식을 차용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면서도,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이라는 상상력을 통해 실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하는 장르다. 복거일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계속되었을 경우를 설정하여, 현실에서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민족주의적 감정과 언어의 중요성을 재조명한다. 이런 설정은 독자에게 불편함과 충격을 주지만, 그만큼 현재 우리가 누리는 문화적 자율성과 언어 사용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작가는 허구의 장치를 통해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며, 독자가 능동적으로 역사와 정체성의 의미를 재해석하게 만든다.

 

기록되지 않은 ‘비명’의 문학적 의미

제목 속 ‘비명’은 단순한 절규가 아니다. 그것은 말해지지 못한 것, 기록되지 못한 언어, 억압당한 존재들의 소리 없는 외침을 상징한다. 이 ‘비명’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국 사라진 역사와 말살된 문화, 지워진 목소리를 복원하려는 문학적 시도다. 복거일은 이 소설을 통해 침묵당한 민중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리려 한다. 주인공 가토가 마지막에 마주하는 ‘한국어의 목소리’는 단지 개인적 진실의 발견이 아니라, 식민 지배 아래 철저히 억눌려왔던 한 민족의 존재 증명이자, 잊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비명’은 오히려 낮고 작으며 조용하게 등장하지만, 오랜 억압 끝에 터져 나오는 가장 인간적인 소리로 묘사된다. 이처럼 『비명을 찾아서』는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의 흔적을 찾아내는 문학의 역할을 다시금 부각시킨다.

 

『비명을 찾아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

『비명을 찾아서』는 단지 과거의 식민지 시대를 상상하는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 정체성, 역사, 기억이라는 복합적인 주제를 통해 현재의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잊고 있는지를 묻는 작품이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사용하는 한국어,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와 정체성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지켜낸 결과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복거일은 이 소설을 통해 언어란 단지 말이 아닌 존재의 조건이며, 그것을 잃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잃는다고 경고한다. 동시에 그는 언어를 통한 저항, 기억을 통한 복원, 문학을 통한 회복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이 소설을 ‘사라진 목소리를 복원하는 문학’으로 완성해낸다. 『비명을 찾아서』는 오늘날 한국 문학이 가질 수 있는 저항성과 철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