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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만세전』 줄거리와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 고백

by KKOKS79 2025. 4. 26.

 

염상섭의 장편소설 『만세전』은 3·1운동 직전 조선을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자의식과 현실 회피, 그리고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글에서는 『만세전』의 줄거리와 인물 분석, 그리고 당대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통해 식민지 시대 인간 내면의 갈등과 윤리적 고뇌를 되짚어본다.

 

만세를 향한 길

 

줄거리 요약: 귀국길에서 마주한 조국의 현실

『만세전』은 주인공 ‘나’가 일본 유학 중 급히 귀국길에 오르며 벌어지는 여정을 통해 전개된다. 그는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으로 향하지만, 그 여정 속에서 일본과 조선의 차별적 현실, 조선인의 무기력과 피폐한 삶을 체감하게 된다. 부산에서부터 서울까지 올라가는 동안, 그는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단면과 부패한 조선인들의 모습, 자기 모순적인 인텔리의 자의식 등을 마주한다. 이 여행은 단지 공간 이동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외면하고 있지만, 조선의 비참함을 애써 직면하지 않으려는 자신의 이중적 태도에 점차 괴로워한다.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곧 식민지 조국의 죽음처럼 느껴지며, 그 속에서 주인공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놓이게 된다.

 

지식인의 내면 갈등과 자기기만

주인공 ‘나’는 일제 지배를 비판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그 체제에 편입되어 있는 모순적 존재이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조선과 거리를 두고 살지만, 정작 조선에 돌아왔을 때 느끼는 감정은 연민보다는 불쾌함과 불편함이다. 그는 조선의 피폐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염상섭은 이런 내면 갈등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복잡한 정체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지식인은 민족의 선봉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 속에서, 실제로는 개인적 안위를 우선시하며 침묵하거나 회피한다. ‘나’는 그 부끄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결국 자기기만 속에 안주하거나,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당시 독립운동의 외연과 내면을 동시에 성찰하게 만든다.

 

‘만세전’이라는 제목의 이중적 의미

『만세전』이라는 제목은 3·1운동 직전의 시점을 가리키며, 역사적 대격변을 앞두고 있는 조선 사회의 불안한 정서를 상징한다. 그러나 동시에 ‘만세(萬歲)’라는 말은 독립운동의 구호이기도 하며, 그 앞의 정적(靜寂)은 민중의 분노와 기대, 체념이 공존하는 시공간을 암시한다. 작가는 이 ‘만세전’을 통해 역사의 바로 그 경계 지점을 포착하려 한다. 세상이 곧 크게 흔들릴 것을 알고 있지만, 대부분의 인물들은 여전히 변화에 둔감하거나, 그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직전의 침묵’ 속에서 인간이 어떤 내면을 구성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를 정밀하게 해부한다. 즉, 『만세전』은 단순한 역사적 전야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완전한 감정과 비겁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이기도 하다.

 

염상섭 문체의 특징: 사실주의의 선구자

염상섭은 한국 근대문학에서 리얼리즘의 기초를 닦은 작가로 평가받는다. 『만세전』에서도 그의 문장은 객관적이면서도 생생하며, 과장 없이 현실을 묘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특히 풍경과 인물, 사건의 배치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태도가 두드러진다. 그의 문체는 단순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심리나 사회적 구조까지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힘을 지닌다. 덕분에 독자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가 겪는 내면의 동요와 사회적 체념을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염상섭은 ‘말하는 문학’이 아닌 ‘보게 하는 문학’을 구현해냈으며, 『만세전』은 그러한 리얼리즘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만세전』이 오늘날 주는 교훈

『만세전』은 단지 식민지 시대를 그린 역사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떤 현실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당신은 과연 진실을 직면할 용기가 있는가?” 작품 속 ‘나’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상징하며, 그를 통해 우리는 지금의 자기 기만과 사회적 무관심을 반추하게 된다. 또한 이 작품은 지식인의 윤리와 책임, 민중과 권력 사이에서의 입장, 그리고 진정한 자각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해 묻는다. 역사는 반복되고, ‘만세전’은 또다시 찾아올 수 있기에, 이 소설은 단지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위한 성찰이기도 하다. 염상섭의 『만세전』은 한국 근대문학이 시작된 출발점 중 하나로서, 여전히 깊은 독서와 사유를 요구하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