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집』은 오정희 작가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로 한 여성의 내면과 유년기의 상처를 조용히 끌어올린 중편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가족의 해체,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로, ‘집’이라는 공간의 상실과 ‘길’이라는 이동성 속에서 인간의 존재가 어디에 뿌리내릴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오정희는 여성의 기억, 침묵, 그리고 고통의 층위를 조용하고도 예리하게 짚어내며, 독자에게 깊은 정서적 울림을 안긴다.
유년기의 상흔과 ‘집’의 의미
『길 위의 집』은 한 여성이 과거 유년기의 기억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어릴 적 살던 집, 그 집에서의 가족, 특히 엄마와의 기억을 중심으로 삶을 되짚는다. 그러나 이 집은 평온한 안식처가 아니다.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무기력과 불안정, 그 사이에서 소녀였던 ‘나’는 안정감을 상실한 채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성장기를 보낸다. 집은 존재해야 할 자리를 의미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소외감을 더 많이 느낀다. 이 소설에서 ‘집’은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정체성의 상징이다. 나에게 집은 언제나 불안정했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곳이었다. 엄마는 언제나 떠날 것 같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아버지는 기억 속에조차 희미하게 남는다. 결국 그 집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고립된 섬처럼, 주인공의 정서적 기반이 되지 못하고 상처의 장소로 남게 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성에 대한 환상을 깨고, 그로 인해 흔들리는 정체성과 자아 형성의 과정을 보여준다. 안정되지 못한 집은 곧 삶의 불안정성과 연결되며, 인물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길 위’를 걷는 존재로 남는다.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진 정체성
『길 위의 집』에서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주인공의 현재는 과거와 계속해서 겹쳐지며, 그녀는 살아 있는 듯하지만 어쩌면 여전히 과거에 붙잡혀 있는 사람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겪은 엄마와의 단절, 애정 결핍, 말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을 기억 속에서 천천히 꺼내본다. 기억은 온전한 재현이 아니라, 감정과 결합된 왜곡된 인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있어 그것은 지금의 자신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그녀는 기억 속 집을 다시 걷고, 방의 냄새를 떠올리고, 엄마가 했던 말과 행동을 되새기며 자기 자신을 해석하려 한다. 이때 ‘엄마’는 단지 가족의 구성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운명, 고립된 감정의 상징으로 겹쳐진다. 기억의 파편들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듯 보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인물의 현재를 만든다. 주인공은 지금의 삶이 불안정하고 외롭지만, 과거의 기억을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그 원인을 찾고, 스스로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오정희는 기억을 단지 회상이 아니라, 자아를 재구성하는 문학적 장치로 활용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숙고를 유도한다.
엄마와 딸, 여성으로서의 고립과 연대
소설 속에서 가장 복합적인 인물은 단연 ‘엄마’다. 그녀는 애정 결핍, 불안정한 태도, 때로는 무책임한 행동으로 딸에게 상처를 준 인물이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 안에서 고립된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남편 없이 생계를 꾸려가며, 안정적인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그 모습이 딸에게는 이해보다는 혼란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오정희는 이 모녀 관계를 통해 여성 간의 갈등과 연대를 동시에 보여준다. 엄마와 딸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엄마는 딸에게 완벽한 보호자가 될 수 없었지만, 그 자체로 딸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딸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의 말투, 표정, 선택을 떠올리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부분을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는지를 체감한다. 이 모녀 관계는 단지 가족 내의 갈등이 아니라, 여성들이 어떻게 세상 속에서 고립되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고립 속에서도 작은 연대와 이해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길’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존재의 유랑
‘길’은 이 소설에서 집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집이 정체성의 뿌리이자 내면의 공간이라면, 길은 끊임없는 이동, 흔들림, 불확실성의 공간이다. 주인공은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된 이후에도 ‘길 위’에 서 있다. 고정된 소속감을 갖지 못한 채, 어떤 장소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떠돌며 살아간다. 오정희는 이 길을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서적 · 존재론적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집을 잃은 자가 떠도는 길, 혹은 관계에서 밀려난 이가 걷는 마음속의 거리. 이러한 ‘길’은 현대인의 고독과 유랑,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실존적 불안을 상징한다. 주인공은 그 길 위에서 과거와 현재, 존재와 부재, 자신과 타인을 이어보려 한다. 길은 끝내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를 걷는 사람은 결국 질문하고, 사유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길 위의 집』은 정착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속에서 우리는 고통의 이면에 있는 강인함을 발견하게 된다.
오정희 문학의 정수, 여성 내면의 기록
『길 위의 집』은 단순한 성장소설이나 회고록이 아니다. 이 작품은 오정희 문학의 정수로, ‘말하지 못한 여성들의 내면’에 귀 기울인 세심한 기록이다. 그녀는 이 소설을 통해 ‘삶을 견디는 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삶을 지나왔는지, 그 시간의 결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묻는다. 작가는 극적인 장면 없이도 깊은 감정을 끌어내는 데 능하다. 그녀의 문장은 서늘하지만 아름답고, 고요하지만 파괴적인 에너지를 품고 있다. ‘집’과 ‘길’이라는 이중 구조 속에서, 주인공은 잃어버린 감정과 이름 없는 기억들을 복원하려 애쓰고, 독자는 그 여정에 함께하게 된다. 이 소설은 결국, ‘살아 있는 여성의 기억’에 대한 예의이며, 상처를 되돌아보는 용기 있는 복원의 문학이다. 『길 위의 집』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되, 그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나’를 회복하려는 문학의 진정성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덮고 나면,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