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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밤의 여행자들』 재난을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적 탐색

by KKOKS79 2025. 4. 22.

 

윤고은 작가의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은 일상의 뒤편에 자리한 재난과 상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인간의 윤리적 태도를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포스팅에서는 소설의 줄거리와 주요 인물, 그리고 ‘기록’이라는 행위를 통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현대 사회의 기억과 망각에 대해 성찰한다.

 

밤의 여행자

 

『밤의 여행자들』 줄거리 요약: 재난을 수집하는 사람들

『밤의 여행자들』은 ‘재난탐사기록가’라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 유진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유진은 ‘네스트’라는 보험회사의 의뢰를 받아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재난 현장을 방문하고, 그곳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하는 일을 한다. 단순한 사건 기록이 아닌, '재난 이후의 감정과 정황'을 수집하는 이 일은 재난 그 자체보다 그 잔재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은 유진이 재난 현장을 찾아다니며 경험한 여러 일화와, 동료 기록가들과의 관계, 그리고 점차 드러나는 회사의 음모를 따라가며 전개된다. 사건이 진행될수록 독자는 기록이 단순한 자료 수집이 아니라, 특정 기업과 권력에 의해 조작되고 이용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유진은 기록의 윤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것에 다시 의문을 품게 된다.

 

‘기록’이라는 윤리와 권력의 경계

『밤의 여행자들』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기록’이다. 이 소설의 세계에서 기록은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수단이 아니라, 미래를 설계하고, 사람들의 감정을 통제하며,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특히 유진이 소속된 회사 ‘네스트’는 재난의 정보를 기업적 이익을 위해 가공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객관적인 기록자로 포장된다. 윤고은은 이 작품을 통해 질문한다. “기록은 과연 진실을 담고 있는가?” 유진이 만나는 다양한 재난 생존자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기억하고, 때로는 왜곡되거나 잊히기도 한다. 소설은 그런 개인의 기억과 회사가 요구하는 기록 사이의 균열을 통해, 기록 행위 자체가 갖는 윤리성과 책임을 묻는다. 기록은 누구의 시선으로, 어떤 목적으로 작성되는가. 『밤의 여행자들』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독자에게도 기록의 윤리를 성찰하게 만든다.

 

재난 이후의 세계: 상실을 견디는 방식

이 소설이 다루는 재난은 단지 물리적 피해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재난이 남긴 정서적 잔재와 인간 내면의 파장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유진이 수집하는 것은 현장의 사진이나 통계가 아니라, 재난 이후 사람들의 표정, 말투, 침묵, 공기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는 곧 우리가 재난을 어떻게 기억하고 견뎌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윤고은은 “재난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어지는 것”이라는 관점을 통해, 단절된 듯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고통이 지속되고 있음을 환기한다. 또한 인물들이 상실을 감내하는 다양한 모습—침묵, 분노, 도피, 기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작가는 재난의 무게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그 감정의 결을 존중하는 서사를 구축한다.

 

윤고은의 문체와 서사 전략: 건조함 속의 섬세함

윤고은의 문체는 매우 절제되어 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사건의 외곽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듯한 그녀의 서술은 오히려 재난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더 강한 몰입감을 제공한다. 과도한 감정의 개입 없이도, 문장 곳곳에서 느껴지는 정서의 파동은 독자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또한 『밤의 여행자들』은 장르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리얼리즘적 디테일과 철학적 사유를 놓치지 않는다. ‘재난’을 중심으로 스릴러적 구성을 가지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플롯의 장치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전략은 이 작품을 단순한 사회고발 소설이 아니라, 인간 본성과 기억에 대한 깊은 탐구로 확장시킨다.

 

『밤의 여행자들』이 던지는 메시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밤의 여행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담고 있다. 재난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단지 뉴스의 한 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에 남은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록하며, 때로는 왜곡되거나 지워지기도 한다. 윤고은은 이 소설을 통해 묻는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고통을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그 기억을 남길 자격이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문학적이 아니라, 윤리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의 성찰로 이어진다. 『밤의 여행자들』은 그 질문을 통해 독자 개개인이 자신의 역할을 되묻게 만드는, 조용하지만 깊은 힘을 가진 작품이다. 밤을 여행하는 자들, 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외면했던 현실을 직시하는 이들이며, 어둠 속에서도 기록을 남기려는 희망의 등불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