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바리데기』는 한국 전통 설화인 ‘바리공주’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장편소설로, 분단과 전쟁, 이주와 타향살이를 견디며 살아가는 한 소녀의 험난한 여정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성의 빛과 치유의 서사를 그려낸다. 이 글에서는 주인공 바리의 삶을 따라가며, 여성 서사, 치유와 재생의 상징성, 그리고 황석영 문학이 품은 세계시민적 관점을 조명한다.
줄거리 요약: 버림받은 공주의 끝없는 순례
『바리데기』는 북한의 함흥에서 태어난 일곱 번째 딸 '바리'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통 신화 속 바리공주처럼,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버림받는다. 하지만 바리는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특별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키운다. 함경도에서의 삶은 곧 기근과 폭력으로 무너지고, 그녀는 가족을 찾아 남한으로의 탈북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바리의 여정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동남아시아, 영국으로 이어지며 난민으로서의 고통을 겪는다. 그 여정 속에서 그녀는 죽음과 상실, 배신, 착취를 마주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연대와 희망, 그리고 스스로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생명력을 경험한다. 결국 바리는 런던에서 이민자들을 돌보는 힐러로 살아가며, 버림받은 존재에서 누군가를 치유하는 존재로 변화한다.
바리공주의 재해석: 여성과 치유의 주체화
『바리데기』는 단순한 설화의 반복이 아닌, 현대 여성 주체의 성장 서사로 새롭게 구성된다. 전통적으로 바리공주는 죽은 부모를 위해 저승길을 떠나는 효녀의 상징이지만, 황석영은 그 서사를 현대의 분쟁과 난민 현실 속에서 재창조했다. 바리는 더 이상 단순한 ‘효녀’가 아니다.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지키고,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며 자기 존재를 확립해가는 주체적 인물이다. 특히 그녀의 몸에 깃든 치유 능력은 단지 신화적 기능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 여성의 은유로 해석된다. 황석영은 이를 통해 여성의 경험을 고통과 헌신이 아닌, 생명력과 재생의 원천으로 그려낸다. 바리의 존재는 끝없는 유랑 속에서도 삶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여신’과 같다.
분단, 탈북, 이주: 경계 너머의 인간 서사
『바리데기』는 바리의 여정을 통해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 탈북민의 삶, 그리고 세계화된 사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고통스럽도록 생생하게 담아낸다. 작품 속 바리는 단지 한 가족의 아픔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이념, 가난과 폭력에 의해 삶이 뒤틀린 수많은 인간 존재들의 집합적 상징이다. 특히 국경을 넘는 장면들은 단순한 지리적 이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형과 존재의 흔들림을 드러낸다. 그녀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자’로서 끊임없이 경계에 선다. 하지만 바로 그 ‘경계성’이 바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황석영은 이를 통해 세계시민적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두며, 고통받는 인간들의 이야기에도 공감과 연결의 희망이 존재함을 말한다.
황석영 문학의 깊이: 정치성과 서사성의 조화
황석영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장면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 온 작가이다. 『바리데기』에서도 그는 탈북, 난민, 불법 체류, 여성 인신매매, 노동 착취 등 사회적 참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도, 독자의 감정을 과도하게 자극하거나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바리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되, 그 고통이 끝이 아니라 변화와 성장의 발판이 되도록 서사를 설계한다. 또한 종교적 상징(저승길, 삼도천, 영혼 치유 등)을 현대화하여 신화적 무게감을 더하며, 바리의 이야기를 한 개인을 넘어선 보편적 구원의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황석영 문학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민에서 출발하며, 『바리데기』는 그런 그의 문학적 세계관이 정점에 이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바리데기』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바리데기』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수많은 경계와 차별, 전쟁과 이주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치유하고 있는가?” 바리의 여정은 단순한 고난극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정신적 이주’의 메타포이다. 황석영은 이 소설을 통해 ‘버려졌지만 끝까지 살아남는 존재’에 대한 찬가를 부른다. 바리는 생존의 기계가 아닌, 고통 속에서 여전히 타인을 돌보고, 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다. 그녀는 인간성의 마지막 경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민과 회복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바리데기』는 그래서 단지 설화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자, 시대를 견디는 인간을 위한 서사이다.